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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분 역사

척준경 그는 누구인가?


이자겸의 난이 아니었다면 우리나라 역사상

최강의 무사로 평가받을 척준경의 일생을

잠깐 동안 따라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우리나라 역사를 둘러보면 삼국지에

나오는 관우나 장비 혹은 여포의 무용담처럼

가슴을 뛰게 하는 전투씬은 거의 없다.


대부분 큰 승리를 거둔 전투에서

지형과 전략에 의한 승리였지,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 무예 하나만으로

전장의 공기를 한순간에 바꿔버린 

그런 무용담은 기록에서 찾기 힘든데,


우리가 배우지 못한 역사상 최고의 무사

척준경의 이야기는 삼국지의 여느

무장들보다 더 드라마틱하다.




가난한 향리 가문 출신의 자식



향리는 지방 행정을 맡아보던 말단 관직으로

지금으로 치면 최하위 공무원 정도 되는

가문의 자식이었는데, 척준경은 글공부보단

무예를 연마하는것을 더 좋아했다.


당시 덩치도 크고 무예도 연마하다보니

힘쫌 쓴다는 무뢰배들과 어울리게 되고,

결국 이리 저리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되는데,


인연의 끈이 닿았는지 척준경은

고려 11대 문종의 셋째아들인 왕희의

집 종자로 들어가게 됐다.


그리고 왕희가 15대 왕 숙종으로 즉위하자

추밀원이라는 말단관리로 임명된다.




척준경 용맹을 떨치다



추밀원에서 9년동안 근무한 척준경은 

능력을 인정받아 동북면 병마사 임간의 부관으로

여진족과의 전투에 임하게 되는데,


당시 여진족은 기병대 즉 말을 타고 싸우고

우리 군사들은 보병들이라 상대조차 되지않아


정주성을 내주고 남쪽에 있는 선덕관으로

퇴각했는데 기병대였던 여진족의 추격을

받아 성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있었다.





이때 척준경은 추적해오던 여진족의 적장

두명을 베어 여진족의 기세를 한풀 꺾어놓고는

임간에게 갑옷입힌 말 한필과 무기를 요구한다.


그리곤 홀로 적진으로 돌격한 척준경은

적장을 죽이고 포로들과 합세하여 활을 쏘고

쫓아오는 여진족 100여명을 숲으로 유인하여

다수의 여진족을 참살하게 된다.


이로써 이번 전투에서 많은것을 잃었지만,

고려는 척준경이라는 무사를 얻게 되었다.




척준경과 윤관의 인연



고려로 돌아온 척준경은 그의 용맹을 칭송하는

사람들이 있었는가 하면 시기하는 자도 있었다.


결국 하급관리가 전장에서 장군에게 요구했다는

이유로 억울한 옥살이를 하게 되는데,

이때 윤관의 도움을 받아 겨우 살아나오게 된다.


이후 여진족 정벌에 나선 윤관과 척준경은

공성전을 펼치던 여진족에 고전하고 있었는데,


척준경은 윤관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 죄를 지어 죽을 몸이었던 저를

살려주신 장군의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그리곤 단신으로 성벽을 기어올라(?)

성벽에 있던 수십명을 참살해버렸고,

그 모습에 기세가 살아난 고려군이 성을

함락하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우게 된다.



척준경 윤관을 아버지로 부르게 되다



윤관과 척준경은 군사 8천명을 이끌고 병목이란

작은 길을 가던중 수만의 여진족의 기습을 

받고 불과 1000여명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그런 위기에 척준경은 10명을 차출하여

적의 후미를 돌파하여 여진족 부관 10명을 

참살하고 적장을 활로 쏘와 죽였다.


죽을수밖에 없던 상황에서 자신과 군사들을

구해준 척준경을 윤관은 진심으로 감사하며


평생 부모와 자식의 연을 맺기로 한다.



단 100기로 2만의 적군에게 돌격



영주성을 지키고 있던 윤관과 척준경에게

2만의 여진족이 공격해왔다.


당시 영주성을 지키던 병사는 그의 절반수준.

이에 척준경은 결사대 100기를 이끌고


2만의 적군에게 돌격하여 적군 19명을

참살하고 혼란에 빠진 적군에게 맹공을

펼쳐 성을 지키는데 성공했다.


이후에도 여진족에 맞선 척준경의

무용담은 꽤 여럿 전해진다.


이쯤 되면 거의 여포에 견줄만한

무용담이지 않는가?



이자겸의 난 그리고 척준경





인종의 외할아버지이자 장인이었던

이자겸의 왕에 대한 간섭이 날로 심해지자,

인종은 이자겸을 제거하려 했지만,


이자겸과 그의 측근이었던 척준경은

역공을 펼쳐 성을 불태우고 결국

인종을 시해하려 하는 사건이 

바로 이자겸의 난이다.


허나 인종의 회유로 이자겸과 갈라선

척준경은 1126년 5월 이자겸을 막아서게 된다



척준경 인종을 구하다



수백명의 사병을 이끌고 궁궐을 공격하던

이자겸은 인종에게 자객 5명을 보냈다.


어전안에 있던 내시와 궁녀들을 살해하고

자객들이 인종을 시해하려하던 그순간,


척준경은 이자겸의 사병들을 단신으로 돌파하여

인종을 구해내고 추충정국협모동덕위사공신에

올랐지만 이후 궁궐을 불태운 꼬리표가 

계속 따라다녔고, 결국 유배를 가게 된다.


척준경의 무용담은 실로 엄청나서

역사에서 중요하게 다루는것이 마땅하나,

이자겸의 측근으로써 궁궐을 불태운 사건때문에

척준경은 기록에 거의 남아있지 않다.




척준경 역사상 최고의 무장



척준경의 믿을수없는 무용담은 

고려 사절요 라는 역사서에서 그 내용을

상세히 담고 있어 허구가 아닌것으로 보인다.


삼국지나 초한지에서 그리는 무장들의

이야기가 소설이라는 테두리안에서

그려졌다는 사실에 어느정도 과장됨이

있다고 볼수 있을텐데,


궁궐을 태운 죄로 귀양을 간 척준경을

조선시대 문종의 허락을 받아 편찬한

고려사절요에서 영웅으로 만들어줄 필요는

전혀 없지 않았을까?


아마도 최소한 척준경의 공을 최소한의

사실만을 무미건조하게 적었을꺼란

추측이 가능하다고 볼때,


척준경의 무용담은 대부분 사실이고,

그가 말년에 저지른 일만 아니었다면,

역사상 최고의 무장으로 우리에게

기억되고 있었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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