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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분 역사

묘청의 난 3분정리


묘청의 난을 통해 당시 서경파와 개경파가

왜 대립했는지 알아보기로 하자




묘청의 난은 지금의 보수와 진보의

대립관계와 많이 닮아보인다.


묘청이 주장한 수도를 서경으로 옮기자는

서경천도운동에 맞서서,

기존 수도인 개경을 지키려는

개경파와의 대립이 묘청의 난의 배경이다.




묘청의 등장과 기이한 행동



묘청은 정심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서경의 승려로,

이자겸의 난으로 대부분 소실된 궁을 재건할때,

관리들을 모아놓고 태장옥장보법 이라는

술법을 선보인적 있는 인물이다.


역사적으로 술법을 부린다는 인물들은

사기꾼의 느낌이 들어 신뢰 하기 힘든데,


정지상이라는 서경파의 핵심인물이

묘청을 인종에게 소개하면서

묘청은 점점 주요인물로 대두되기 시작했다.




금과의 화친을 거부하다



이자겸이 권력을 잡고 있던 시기에 금을

형님의 나라로 모신다는 약속과 함게

맺은 화친을 인종은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렇지만 자신을 지지해주는 세력이 없어

전전긍긍하고 있었는데 이때 나타난

세력이 바로 서경파였다.


서경파는 고구려의 정신을 계승하여

북진정책을 주장했으며,

이에 수도를 서경으로 옮기자는 주장을 한다.




서경파 와 개경파의 대립구도



이자겸이 잡고 있던 어마어마한 권력은

이후 척준경의 탄핵때 큰 공을 세운

김부식과 정지상으로 양분되었다.


김부식이 이끄는 개경파는

현재의 권력에 만족하였기 때문에

변화를 싫어했고 싸움을 싫어했다.


-금과의 사대관계 유지-


반면 서경파는 고구려의 정신을 계승하여

북진정책을 주장하고 금과의 사대를

반대했는데 이는 문벌귀족에게 힘을 빼앗긴

인종의 왕권강화 의지와 연관이 있었다.




풍수지리에 밝은 묘청의 제안


묘청은 풍수지리에 밝은 인물이었는데,

그런 그가 수도를 개경에서 서경으로 옮기면

고려가 부강해질것이라고 거듭 제안하자,

인종은 못이기는척 제안을 받아드리게 된다.


인종으로서는 이미 타버린 궁을 옮기는것에

거부감이 덜했으며, 특히 문벌귀족들이

가지고 있는 특권에 심한 적대감이 있었다.


지금으로 치면 서울에 집과 땅을 가진

권력층들이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는 격이다.


물론 문벌귀족들의 강한 반발은

당연한 수순이었을 터 ~




서경 천도 좌절되다



인종의 의지는 확고해 보였고,

서경파는 왕의 의지를 받으며 득세했지만,

가만히 있을 문벌귀족들이 아니었다.


이미 고려를 황제국이라 칭하고

금을 정벌하기 위해 서경에 궁도 건설중이었지만,


문벌귀족들은 서경파가 왕의 자리를

뺏아기 위한 음모라는 소물을 퍼트렸고,


이자겸이라는 경험을 한 인종은

마침내 묘청과 등을 돌리게 되는데...




왕이 안하면 스스로 하겠다 !



묘청은 서경 천도라는 대업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묘청의 난으로 발전하게 된다.


묘청은 대위국의 수립을 선포하고

연호를 하늘을 연다는 뜻으로 천개 라고 짓는데,


묘청의 진영에서 내분이 생기고,

토벌대 김부식의 활약으로 결국

묘청은 한줌의 재가 되고 말았다.


물론 반란군은 그후 1년에 거쳐 저항했지만,

북진정책의 꿈은 먼훗날로 미뤄졌다.




묘청의 난 의의와 결과



묘청이 주장한 서경천도운동은 단순히

북진정책만을 바라볼게 아니다.


문벌귀족의 횡포가 날이갈수록 심해져,

백성들의 삶은 날로 피폐해져갔는데

이때 문벌귀족의 힘을 약화시킬

특효가 바로 서경천도 운동이었다.


허나 묘청의 난이 실패로 끝나고,

왕권과 무신들의 힘은 더욱 약화되고,

문신들의 힘은 더욱 거대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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