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플기사단은 십자군 전쟁 당시 용맹함과
수많은 무공을 세운 기사단이었지만,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템플기사단의
비극적인 결말을 이야기 해보고자 합니다.
십자군 전쟁 당시 상황
서기 1099년 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하면서
그곳에 국가를 건설했지만,
예루살렘은 이슬람 국가들로 둘려쌓여있었기에
십자군과 이슬람의 싸움은 계속되었다.
당시 십자군의 가장 큰 고민중 하나는
예루살렘을 탈환했다는 소식에 기뻐한
수많은 유럽인들이 성지순례를 오던중
이슬람 교도들에게 약탈당하는 일이었는데..
템플 기사단의 탄생
이때 프랑스의 귀족 위그 드 파양스가
뜻을 같이 하는 9명의 기사들과 함께
종교기사단을 결성하여 순례자들을
보호하는 중요한 임무를 맡게 되었다.
이에 예루살렘 왕이었던 보두앵 2세는
그들에게 솔로몬의 성전에 있던
알 아크사 사원을 그들의 본부로 내주었고,
이 기사단이 사원에 본부를 두었다하여
이들을 템플 기사단이라 불렀다.
템플기사단 이름을 떨치다
템플기사단은 순례자들을 보호할 뿐만 아니라
전투에도 참가했는데, 죽음을 두려워하지않는
용맹함이 전 유럽에 알려지면서
입단 지원자가 몰려들었다.
뿐만 아니라 각종 후원금을 조달받고,
교황 인노켄티우스 2세로 부터
교황 이외에 다른 왕이나 귀족에 대한
복종의무가 해제됨은 물론,
세금혜택과 광활한 토지를 부여받았다.
어느샌가 그들은 하나의 기사단에서
부러움과 시기를 동시에 받는
권력 집단이 되어가고 있었다.
십자군 예루살렘 함락
1291년 십자군과 이슬람의 길고 긴 전투에서
십자군이 결국 예루살렘을 포기하면서
템플기사단 역시 프랑스로 돌아가게 된다.
그때 다른 기사단들은 새로운 목표를
위해 떠났지만 템플기사단은
이미 막대한 부와 권력을 소유하고
있었기에 큰 위기의식은 느끼지 못했다.
이런 그들을 곱지 못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던 세력이 있음은 당연했다.
필리프 4세의 욕망
당시 프랑스 국왕인 필리프 4세는
십자군원정의 패배후 교황의 힘이 약해진
틈을 이용해 서서히 권력을 찾고 있었는데,
당시 궁핍한 재정과 막대한 빚을
떠안고 있던 필리프 4세는
프랑스 내의 유대인의 재산을 몰수하고
로마 교황청에 기부하던 봉헌금을 금지하며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그리고 템플기사단으로 부터
많은 양의 빚을 지고 있었는데,
결국 필리프 4세의 칼날은
템플 기사단을 향하고 있었다.
템플 기사단 이단으로 몰리다
필리프 4세는 템플 기사단이 가진
힘을 빼앗고 재산을 몰수하고 싶었다.
결국 그는 템플기사단이 승낙치 않을 제안을
하는데 그것은 바로 성 요한 기사단과의
합병이었고 답변은 역시 거절이었다.
이에 필리프 4세는 전유럽의 영웅으로
추앙받던 템플기사단에 거짓죄목을
무려 200여가지나 붙여 그들을 체포해
고문하고 거짓자백을 받아내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는데 성공한다.
피의 날 13일의 금요일 유래
당시 이단 심문에 참여한 사람들은
그들의 권력을 탐탐치 않게 여겼던 사람들로
이루어졌으며, 공정할리 만무했다.
결국 대부분 고문을 받다가 사망했으며,
살아남은 사람도 1314년 화형에 처해지는데,
그들이 체포당한 날은 1307년 10월 13일
금요일이었으며, 이때부터 13일의 금요일은
불길한 날 혹은 피의날로 불려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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